Ⅳ. 인간의 충만함을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189-198항]
Ⅳ. 인간의 충만함을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
189.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어도 안 되며 경제가 효율 중심의 기술 지배 패러다임에 종속되어서도 안 됩니다. 공동선을 고려할 때 오늘날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삶, 특히 인간의 삶에 봉사해야만 합니다. 제도 전체의 검토와 개혁을 위한 확고한 결의 없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은행을 구제하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은 금융의 절대적 지배를 재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지배에서는 미래가 없고, 장기간에 걸쳐 많은 비용을 치른 피상적인 회복 이후 결국 새로운 위기가 닥칠 뿐입니다. 2007-2008년의 금융 위기는 윤리 원칙을 더 잘 존중하는 새로운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투기 금융 관행과 가상의 부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수립할 기회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위기에 대응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낡은 기준들을 재검토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생산이 늘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흔히 상품에 그 실제 가치에 일치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하는 경제적 변수들이 작용됩니다. 이는 종종 특정 상품의 과잉 생산을 초래하고, 환경에 불필요한 피해를 입히며 지역 경제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옵니다.133 또한 금융 거품은 일반적으로 생산 거품을 야기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실물 경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실물 경제야말로 생산의 다각화와 증진을 촉진하고, 기업들이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해 주며, 중소기업의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가능하게 합니다.
190.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환경 보호는 오로지 금전적인 손익 계산을 바탕으로 해서는 보장될 수 없고 환경은 시장의 힘으로 적절하게 보호하거나 증진시킬 수 없는 재화 가운데 하나”134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업이나 개인의 이윤 증대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는 마술적 시장 개념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윤 극대화에만 집착하는 이들이 미래 세대에게 남겨 줄 환경의 영향에 대하여 차근차근 생각하기 바라는 것이 과연 현실적이겠습니까? 이윤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틀 안에는 자연의 순환, 자연의 쇠퇴와 재생의 시기, 또는 인간의 개입으로 심각하게 변형될 수 있는 생태계의 복잡함에 대한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생물 다양성은 기껏해야 착취 가능한 경제적 자원의 창고로 여겨질 뿐이며, 사물들의 실제적 가치, 인간과 문화에 주는 의미, 가난한 이들의 관심과 필요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91.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면, 진보와 인류 발전을 비이성적으로 저지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이면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천연자원의 지속 가능한 이용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기적으로 볼 때 또 다른 경제적 이익을 낳을 수 있는 투자가 됩니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혁신적이고 환경에 덜 영향을 미치는 다양화된 생산 방식이 유익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또 다른 가능성의 길을 여는 일이 됩니다. 인간의 창의성과 진보에 대한 꿈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새로운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192. 예를 들어, 좀 더 창의적이고 바람직한 생산 방식의 발전은, 현재 소비에 대한 기술 투자가 과도한 것에 견주어 인류가 직면한 시급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투자에는 소홀한 것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재사용, 개조, 재활용과 같은 현명하고 유익한 방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의 에너지 효율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생산의 다각화는 인간 지성이 창작과 혁신을 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동시에 환경을 보호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이는 인간의 고귀함을 다시 피워 내는 창의력이 될 것입니다. 삶의 질이라는 더욱 폭넓은 의미에서,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발전 방식을 찾으려는 용기와 책임을 발휘하며 지성을 발휘하는 것이 더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새로운 소비 기회와 즉각적인 이윤만을 위하여 자연을 훼손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존엄과 창의력이 모자라는 천박한 일입니다.
193. 일부 경우에 지속 가능한 발전이 새로운 형태의 성장을 가져오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성장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속도를 어느 정도 줄여 합리적 한계를 설정하고, 더 나아가 너무 늦기 전에 되돌아가는 것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간 존엄에 맞갖은 삶을 살 수 없는데도, 소비와 파괴를 더욱 늘리는 사람들의 행태는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제 세계의 일부 지역이 불경기를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다른 지역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지원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기술적으로 발전한 사회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여 좀 더 검소한 생활 방식을 실천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135고 말씀하셨습니다.
194. 새로운 발전 모델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세계적인 개발 모델”136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는 “경제의 의미와 경제 목표를 고찰하여 그 역기능과 오용을 바로잡는 것”137에 대한 책임 있는 성찰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타협책으로 자연 보호와 경제적 수익의 균형, 또는 환경 보존과 발전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주제에 관하여 적당히 타협하게 되면 단지 불가피한 재앙이 조금 늦추어질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발전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 나은 세상과 전체적으로 더 높은 삶의 질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기술과 경제 개발은 발전으로 볼 수 없습니다. 경제가 성장해도 종종 인간 삶의 질이 실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환경이 악화되고 식품의 품질이 떨어지며 일부 자원이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논의는 흔히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이는 생태에 관한 담론의 가치를 금융과 기술 지배주의의 논리에 흡수시키고, 기업의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은 흔히 일련의 마케팅과 이미지 관리의 활동으로 축소됩니다.
195. 이윤 극대화의 원칙은 다른 모든 시각을 외면하며 경제 개념을 왜곡합니다. 이는 생산이 늘기만 한다면 미래 자원이나 환경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벌채로 생산이 늘기만 한다면 한 지역의 사막화, 생물 다양성의 훼손, 오염의 증가로 발생하는 손실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기업들은 비용의 극히 일부만을 계산하여 지불하며 수익을 냅니다. “공동의 환경 자원을 이용하는 데에 드는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다른 민족이나 미래 세대가 아니라 그 이용자가 온전히 부담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도록”138 할 때에만 윤리적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이 또는 계획 경제를 추진하는 국가가 자원을 배분할 때에 현재의 필요를 위한 정태적 현실 분석만을 제공하는 도구적 이성이 개입됩니다.
196. 정치와 관련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보조성의 원리를 되새겨 봅시다. 이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자유를 보장하면서 또한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이들이 공동선을 위하여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경제 부문이 국가보다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결여된 경제는 현재 위기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처할 수 있는 다른 논리를 지지하지 못할 것이기에,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환경에 대한 참된 배려가 없는 논리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의 통합에 대한 관심이 없는 논리입니다. “오늘날 ‘성공’과 ‘자립’의 모델에서는 뒤처진 이들이나 힘없는 이들, 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돕고자 투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기”139 때문입니다.
197. 우리는 폭넓은 시각으로 위기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하여 학제적인 대화를 포함한 새로운 통합적 접근을 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흔히 올바른 공공 정책의 부재와 부패에서 비롯된 정치에 대한 불신은 정치 자체가 책임져야 합니다. 한 지역 국가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일부 기업 집단이 후원자를 자처하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은 특정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조직범죄, 인신매매, 마약 매매, 폭력과 같은 근절시키기 어려운 모든 형태의 범죄들을 일으키는 데에 이릅니다. 정치가 왜곡된 논리를 깨어 버릴 수 없고,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인류의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다운 변화를 위한 전략에는 전체 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현대 문화의 뿌리에 놓여 있는 논리를 문제 삼지 않고 몇몇 피상적인 생태적 고려 사항만 다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건전한 정치는 이러한 문제에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198. 정치와 경제는 빈곤과 환경 훼손에 대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와 경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상호 작용의 방법을 찾기를 바랍니다. 한쪽은 경제적 수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한쪽은 권력의 유지나 확대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남은 것은 전쟁이든지 아니면 환경 보호와 가장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고 정치와 경제 양자가 맺는 불순한 협약입니다. 여기서도 “일치는 갈등보다 우월하다.”140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용출처 - https://www.cbck.or.kr/Notice/20210427?gb=K1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