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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성사의 표징들과 안식의 거행[233-237항]생명에 대한 외경/찬미받으소서 2024. 7. 16. 23:59
Ⅵ. 성사의 표징들과 안식의 거행
233. 세상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채워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펼쳐집니다. 따라서 나뭇잎, 길, 이슬, 가난한 이의 얼굴에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159 이상적 관상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찾고자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활동을 더 깊이 느끼고 외부의 피조물들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더 잘 이해하면 관상이 더 완전해집니다.”160
234.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가르침대로, 이 세상 실재들과 경험들 안에 있는 모든 선함은 “하느님 안에 탁월하게 무한히 현존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 숭고한 실재들 하나하나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161 이는 이 세상의 유한한 것들이 실제로 신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성가는 하느님과 모든 존재 사이의 그 긴밀한 유대를 체험하고 이로써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162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산의 웅장함에 경외를 느끼는 이는 이 경험을 하느님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고 자신이 체험하는 이 내적 경탄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산들마다 정상이 있고, 높고 장엄하며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넘칩니다. 이 산들은 제가 사랑하는 그분과 같습니다. 외딴 계곡들은 고요하고 아늑하며 시원하고 그늘져 신선한 물이 흘러넘칩니다. 그곳은 다채로운 식물과 아름다운 새소리로 인간의 감각에 깊은 휴식과 아늑함을 주고, 우리가 고독과 고요 안에서 기운을 북돋우고 휴식하도록 해 줍니다. 이 계곡들은 제가 사랑하는 그분과 같습니다.”163
235. 성사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연을 받아들이시어 초자연적 생명을 전달해 주시는 수단으로 삼으시는지를 보여 주는 특권적인 방식입니다. 경신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또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도록 초대됩니다. 물, 기름, 불, 색깔은 그 모든 상징적 힘을 지니게 되어 우리의 찬미에 포함됩니다. 강복하는 손은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 삶의 여정에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함을 반영합니다. 세례 때에 어린이 몸에 붓는 물은 새 생명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해서 세상을 도피하거나 자연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특히 동방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사랑받는 말의 하나인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일치와 변모된 인간의 전형을 표현하기 위해 어디서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에서, 소리에서, 색깔에서, 빛에서, 향기에서 그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164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세계의 모든 피조물은 강생하신 말씀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찾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물질세계의 일부를 취하시고 궁극적인 변화의 씨앗을 세상 안에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물질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체성은 전례 행위 안에서 그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습니다. 전례에서 인간의 몸은 성령의 성전으로서 그 내적 본질을 드러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육신을 취하신 바로 주 예수님과 결합됩니다.”165
236. 피조물들은 성찬례 안에서 가장 탁월하게 드높여집니다. 감각적인 방식으로 직접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 은총은,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시어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실 때 최상의 표현에 이릅니다. 주님께서는 강생의 신비의 정점에서 작은 물질을 통하여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가닿고자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위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오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십니다. 성찬례 안에서 이미 완성이 이루어지고, 그 안에는 세상의 핵심, 사랑과 생명이 무한히 넘쳐흐르는 중심이 있습니다. 성찬례 안에 현존하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나 되어 온 우주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성찬례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 면에서는 늘 세상의 제대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166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이어 줍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품고 그 안에 스며듭니다.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세상이 복되고 온전한 경신례로 하느님께 되돌아갑니다. 성찬의 빵 안에서 “창조는 성화를 향하여, 거룩한 혼인 잔치를 향하여, 바로 창조주와 이루는 일치를 향하여 나아갑니다.”167 따라서 성찬례는 또한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위한 빛의 원천이며 동기로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관리자가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237. 주일 성찬례 참여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닙니다. 주일은 유다교의 안식일처럼,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주일은 부활의 날, 새 창조의 ‘첫날’입니다. 이 새 창조의 맏배는 주님의 부활하신 인성으로 피조 세계 전체의 결정적 변모에 대한 약속입니다. 나아가 주일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168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안식의 가치와 축제의 가치를 결합시킵니다. 관상하는 안식이 비생산적이며 불필요한 것으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수행하는 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그 의미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용성과 무상성의 차원을 우리의 노동 안에 포함시키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또 다른 방식의 활동으로서, 우리 본질의 일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활동을 공허한 행동주의로부터 보호합니다. 또한 우리가 배타적 개인적 이득만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끝없는 탐욕과 고립감을 막아 줍니다. 안식일 율법은 이렛날 일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이는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23,12). 안식은 우리가 더 넓은 시각으로 다른 이들의 권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처럼 성찬례를 중심으로 하는 안식일은 주간 전체에 빛을 비추고 우리가 자연과 가난한 이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고무합니다.
[내용출처 - https://www.cbck.or.kr/Notice/20210427?gb=K1200 ]'생명에 대한 외경 > 찬미받으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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