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21
해산하는 여자가 근심에 쌓이지만 그 고통을 참아 견디는 이유는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만으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희망이 없는 고통입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는 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느끼는 불안과 의심은 낙심과 미래에 대한 비관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이 희망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며 바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희망. 바로 그 희망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희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저 역시 희망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이며, 무엇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더지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희망을 말하라고 한다면, 저의 희망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분과의 관계,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과 관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저는 더 나아가서 희망의 표징이 되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